또다른 세상 만나기 02

“그때 네가 그랬잖아. 진짜 웃겼는데. 난 네가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

“아, 내가 그랬어? 내가 그런 소릴했다고?”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 맥주 1리터를 갓 넘겼을 때, 친구가 내뱉은 이 한 마디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했던 거지? 또 난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지 않아 그냥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하기사 핸드폰을 놓고 출근하거나 아침에 머리를 두 번 감는 것도 일상인데, 3~4년 전 입 밖을 떠난 말이 기억날리 없지 뭐. 

기억나지 않는 예전의 내 말은 예나가 선정이 딸이었다는 사실만큼 충격적이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개씩 내뱉는 말들 역시 모두 다 기억될 순 없는 법이다. 표현되지 못하고 삼켜지는 말들이 머릿속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생각과 행동의 순간엔 언제나 언어가 있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도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언어는 우리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가치관까지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동질감을 느낀다. 코드가 맞는다는 느낌 때문이다.

각자가 속한 커뮤니티 내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커뮤니티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다른 사람들과 본인을 구분 지으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구분을 짓는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개중에는 ‘저 사람이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지의 여부’도 있다. 단순히 ‘유치한 편가르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개념에는 의외의 학술용어도 있다. 언어학자들은 같은 언어 코드를 사용하는 이 그룹을 가리켜 ‘스피치 커뮤니티(Speech community)’라 일컫는다.

사실 스피치 커뮤니티는 단지 내 편 네 편을 나누는, 그런 간단한 개념만은 아니다. 아주 옛날부터 존재한 역사의 산물이다. 유럽의 사제들이 사용하던 라틴어, 귀족 계급의 프랑스어, 동아시아 사대부의 한문 등이 바로 그랬다. 이 귀족들 역시 각자의 코드를 활용해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려 들었다. 

이렇게 이해가 일치하는 사람들ㅡ특히, 힘 있는 사람들끼리 뭉치다보니 이들이 쓰는 언어에도 힘이 실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배자들은 그들의 언어 권력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옳은’ 언어를 만들었고, ‘틀린’ 언어를 쓰는 피지배자들을 계몽하고자 했다. ‘맞춤법(法)’이나 ‘문법(法)’, ‘발음법(法)’과 같은 ’법’의 이름으로 언어를 규격화/법제화하게 된 것이다. 법이란 것이 강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하던 시대였기에, 약한 자가 정복자의 언어법을 따르도록 요구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의 언어생활마저 정복하고자 했다”

법제화된 언어의 산물로는, 영국 특권층의 말투를 모방하도록 설계된 ‘문장의 5형식론’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영국의 문법학자 어니언스(C.T. Onions)가 처음 만들어 낸 이 이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긴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문법학자 호소에 이즈키(細江 逸記)가 일본 스타일로 다듬은 것을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그대로 흡수했다. 도처에 퍼져 있던 일본식 영어 학습법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영어교사 송성문이 <성문 종합영어>라는 이름으로 집대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니언스나 호소에 이즈키, 송성문이 활약하던 시기는 권력의 중요성이 가장 강조됐던 때였다. 어니언스는 세계 역사 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대영 제국 절정기ㅡ빅토리아 시대ㅡ의 인물이었고, 호소에 이즈키 역시 영·미·일이 연대하던 한일합방 시대의 영어교사였다. 송성문도 한때 통역장교로 6·25 전쟁을 겪었다. 승자의 언어 확산에 기여한 주역들은, 하나 같이 여러 세력 간의 힘겨루기를 몸소 경험해 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옛날 승자들의 언어가 아직까지 살아남아 현재의 누군가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오싹해진다. 그저 아주 옛날에 주도권을 잡았던 세력의 언어일 뿐인데 말이다. (심지어 어떤 누군가는 그 ‘승자의 법칙’ 배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컨트롤하는, 아주 강력한 도구 중 하나다. 같은 맥락에서 옛 지배자들이 언어 통제력을 확보하려 노력했던 것은 꽤 괜찮은 시도였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규격화된 언어 법칙을 배운다는 건 ‘언어’ 그 자체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아닌, 언어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만을 주입하는 것일 뿐이다. ‘피지배자들의 완전한 정복’이라는 목표에 있어 언어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했다. 언어가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언어보다 더 방대하고 자유롭다는 걸 간과했다.

평소 나의 생각은 어떤 언어로 표출되는지 되돌아봤다. 가족, 친구들, 직장동료들의 언어를 좇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 언어는 어디있지?” 타인의 언어를 잘 따라하는 법보단 ‘어떻게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낼까’를 고민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자료

  • 조승연, 『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와이즈베리